오롯이 디자인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 이유만으로 (비싼 돈주고) 구입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만년필 카페인 문방삼우에서 검색해보니, 유구한 문방삼우의 역사에서도 딱 두 분정도만 언급하신 브랜드라서, 모르실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대만 Ystudio Brassing Portable 만년필(f닙)을 소개합니다.
패키지부터 느낌이 있네요. 살짝 기울어지게 프링팅된 것이,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입니다. (물론 안 기울어지게 프린팅되었다면 기분은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하하)
物外라…. 무언가 의미가 있는 단어같아 찾아보았는데요, 수입처 블로그를 찾아보니, 18세기 중국작가 ‘심복’이 쓴 《부생육기》 중 2장 첫머리 문장에 나오는 단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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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藐小微物,
必細察其紋理,
故時有物外之趣
조그만 미물을 보게 되면
자세히 그 무늬를 관찰했으므로
때때로 세상에 없는 멋을 알게도 됐다
심복, 「부생육기」 中 — 을유문화사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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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들의 이면에 있는 깊은 의미와 감정과 가치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와이스튜디오의 디자인 철학을 ‘物外’라는 단어를 빌려 표현한 것 같습니다.
상자 안에는 설명서와 휴대용 나무 케이스, 만년필 본품, (휴대를 위한 용도의) 끈과, (좀 더 빈티지한 갬성을 누리고 싶은 분들을 위해 직접 커스터마이징하라는 의미에서) 사포가 들어있습니다.
저는 사포질은 안했고, 막 굴려쓰면서 저만의 흔적이 새겨지게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바디 재질이 황동이라 변색도 되고 흠집도 나면서 더 멋스러워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무 케이스에 담아 다닐 수 있습니다. 같이 제공된 끈을 연결해서 가방에 달거나 목에 걸고 다닐 수도 있네요.
객잔에 들른 평범한 나그네, 무심하게 어깨에 메고 다니던 나무통에 실은 천하의 명검이 들어있고, 그가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무림고수였다는, 그런 클리세가 순식간에 머릿 속에 자동재생되는 디자인입니다.
멋집니다.
검을 뽑듯이 푸쉬캡을 뽑아봅니다.
블랙과 골드의 조합은 늘 좋은 거 같습니다. 거기에 육각형의 바디모양이, 며칠 전에 산 까렌다쉬 에크리도처럼(그만 사야하는데…), 감성을 제대로 자극해줍니다. 늦은 밤, 나무 책상, 스탠드 불빛, 좋아하는 음악, 그 속에서 아무 거나 끄적이고 싶어지게 만드는 펜이네요, 이 펜 역시.
잉크 충전은 컨버터 방식이구요, 저는 「몽블랑 어린왕자 사막의 모래」 잉크를 넣었습니다. 닙과 컨버터 모두 슈미트 사의 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틸닙이며 저는 F닙을 구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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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아 메모패드 위에 시필해본 사진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F닙 중에서는 가장 얇은 선을 그어줍니다. 일제 F닙은 없지만, 추측컨대, 일제 F닙과 유럽 F닙의 중간정도의 선굵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필감도 매우 부드럽고 안정적입니다.
마감이 매우 깔끔하고 만듦새가 꼼꼼한 펜입니다. 물론, 슈미트 사의 스틸닙과 컨버터를 바탕으로 하우징과 패키징만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것 치고는’ 가격도 꽤 비싸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뭐랄까요, 디자인만으로 이 제품을 사게 되었다는 점에서, 디자인의 힘, 또는 디자인의 부가가치를 보여주는 제품인 것 같습니다.
덕분에 펜생활이 더 즐겁습니다.